경상북도 영천시 은해사 주지 법타(60) 스님의 사회 활동 이력만 보면 스님이라기보다 시민운동가나 통일운동가에 가깝다.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평불협) 창립회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지도위원, 불교시민단체협의회(불민협) 상임공동대표, 북한에 국수공장과 알약공장 설립, 10년간 매일 7700명분의 국수원료 제공, 지금까지 북한 방문 40여 차례… . 지난 1989년 임수경씨에 일주일 앞서 민간인이 비자를 받는 방식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던 스님은 그 뒤 평불협을 설립, 대북 교류협력과 지원을 본격화하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눈에 띄는 점은 종교인보다 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두드러지기 일쑤인 여타 종교인 활동가들과 달리, 그는 불교계 내부에서도 간단치 않은 이력을 쌓아왔다는 것이다. 1965년 추담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고 불문에 들어온 뒤, 율사로 이름높은 일타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그는 광주 원효사, 경주 기림사, 동두천 자재암 주지를 거쳐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 주지를 3연임 중이다.
동국대 불교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클레이튼대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그 연배의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공부도 제대로 한 셈이다. 영천 은해사에 대규모 수림장(수목장·樹木葬)을 조성함으로써 장묘 문화의 변화를 선도한 이도 바로 법타 스님이다. 불교계의 신망도 만만찮아 일각에서는 머지않은 장래 조계종 총무원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이런 자신의 삶에 대한 법타 스님 본인의 생각이다. 구한말 경허선사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를 휩쓰는 것은 수행을 통한 깨침. 그런데 수행보다 절집 경영과 교육, 현실 참여에 무게를 두고 살아온 스스로의 삶을 본인은 어떻게 설명할까?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해 허다한 수행승을 제쳐두고 법타 스님을 만난 것은 어쩌면 그의 삶에서 부처님 오신 뜻을 다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래서인지 지난달 27일, 서울 성북동 평불협 사무실에서의 인터뷰 첫 질문도 “왜 이판(理判·수행을 주로 하는 스님)이 아닌, 사판(事判·사찰 행정이나 경영을 주로 하는 스님)이냐” 는 것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체질에 맞는다” 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람이 세속을 떠나 불문에 드는 것은 삶의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자가 되려는 것, 아쉬움이 없었을까. 몇 년 전 어느 사찰의 주지를 지내며 많은 일을 했던 분이 세상을 떠날 때 아쉬워하면서 ‘다음 생에는 반드시 수행승으로 태어나 깨침을 얻고야 말겠다’ 는 말까지 했다던데… . 스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가장 큰 폐단 중 하나는 수행 지상주의예요. 세상이야 어떻든, 혼자만 수행해 도를 깨치면 그만이라는 게지. 하지만 불교의 근본 목적이 뭡니까?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보리의 지혜를 구하여 닦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는 것 아닙니까. 성불의 목적도 중생을 제도하는데 있는 거야. 사찰 경영이나 교육에 몸을 사리지 않고, 현실에 적극 나서는 게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아쉬움이 없다” 고 말했다.
남북교류협력이나 북한동포돕기 사업에 앞장 선 것도 그랬다. 처음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스님은 비교 종교학을 전공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대학 도서관에서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관련 자료를 처음 접하며 충격을 받는다. 다른 나라 사람도 이렇게 북한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없다니… . 착잡했다.
스님이 이 때 받은 충격은 전공을 비교종교학에서 북한불교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북한 불교를 연구하면서 생각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 민족고(民族苦)의 근본 원인은 바로 분단이 아닌가. 이를 해소하지 않고 우리 민족은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믿은 그에게 성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족화합과 통일이었다.
결국 1992년 평불협을 창립해 통일 운동에 나서던 중, 북한에서 흉작이 시작됐고 사람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이 부처이고 졸리운 사람에게는 잠재워 주는 것이 제일. 병자에게는 물론 약을 주어야 했다. 그가 금강국수공장과 정성알약공장 등을 설립, 국수와 약을 북한 주민에게 전한 것은 육바라밀(六波羅密·보살이 수행에서 열반에 이르는 6가지 방편)중 첫째인 보시(布施·베푸는 것)를 실천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진 않았다. 국제 곡물가가 아무리 싸다고 한들, 7700여명이 먹을 국수의 원료를 매일 10년동안 조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YS 정권 중기, 신공안정국의 와중에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돼 한때 국립 선방(서울 구치소)에서 여름 한철 강제 수행을 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경실련과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등의 시민 활동에 적극 참여해 활동한 것도 실은 이런 국내의 정치 사회 현실과 관계가 없지 않다.
시민운동과는 다르지만, 법타 스님과 은해사가 최근 사회의 주목을 받은 일이 있다. 바로 은해사가 조성한 수림장(수목장) 때문이다.
“매장을 주축으로 하는 장묘 문화의 대안으로 납골당을 생각했으나 이것도 문제가 많았어요. 그러던 중 고 김장수 고려대 농대학장의 수목장 소식을 전해듣고는 이거다 싶었지. 수목장이야말로 육신이란 인연따라 만났다 흩어지고, 나무에도 생명이 있으며, 나와 너, 나무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불교의 생사관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잖아요.”
은해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계종 종립인 은해사 승가대학원도 빼놓을 수 없었다. 기자가 우연한 기회에, 그 곳 졸업생이 졸업 논문 삼아 내놓은 역서의 수준이 보통이 아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승가대학원 운영위원장, 교육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보았다.
“나는 평소에 줄곧 교육입종(敎育立宗)을 주장해 왔지. 수행도, 포교도, 화두도 모두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흔히 선방에서 사교입선(捨敎立禪·경전이나 어록을 버린 채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알음알이에 지나치게 기대지 말라는 말이지, 경전 공부를 게을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불교 수행자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거야. 교야말로 선의 나침반인데, 그 나침반이 없으니 참선인들 제대로 되겠어요. 그런 면에서 불교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불교개혁을 이야기하며 그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졌다. 해방 이후 줄곧 개혁을 부르짖다시피 해 온 조계종에 아직도 개혁할 것이 있다는 말인가.
“만해 스님이 100년 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장했지만, 유신된 게 별로 없어요. 행정 중심으로 짜여진 총무원을 교육과 포교 중심, 교화중심으로 개편하고 이판과 사판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승가대(강원) 4년, 참선 3년 마치면 사판에서도 3년 일하며 절 살림에 대해서도 알게 해야합니다. 스님이 돈을 모른다는 게, 돈이 없다는 게 자랑이 아니야. 이젠 사찰도 경영이고, 이익을 내야 해요. 1000년의 노하우를 최대한 살려 필요한 곳에 돈을 쓰면서 민족과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원효와 만해, 일연 스님을 사표로 삼고 있다고 했다. 하화중생에 앞장서고(원효), 민족과 역사에 몸 바쳤으며(만해), 민족의 자주와 자립을 실천한 (일연) 스님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사회에 환원한 대표적인 스님이라는 이야기였다. 마침 부처님 오신날, 스님이 일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면서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하늘과 땅아래 오직 나자신이 가장 존귀하다.)이라는 말 뒤에는 ‘삼계개고오당안지(三界皆苦吾當安之·온 세상이 괴로움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라는 말이 따라 와요. 그러니 ‘천상천하유아독존’ 은 나 홀로 잘 났으니 홀로 잘 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을 외친 동시에 나와 남, 나의 종교와 남의 종교, 우주만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생공영케 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일대 선언입니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 편안하게 잘 살아가자는 것이 부처님이 탄생하신 뜻이자 가르침이지요.”
그는 여기에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매사에 주인이 되고, 지금 이자리에서 진리를 구한다)’ 이라는 임제선사의 어록을 덧붙였다. 이는 불교적인 가르침이지만, ‘주인이 주인답지 못하니까 주변 열강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우리 민족이 새겨야 할 말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그말을 들으며 다시 살펴본 스님의 본적은 경북 울릉군 독도리 산 30번지. 그는 출가 수행자이면서도, 이 땅의 사람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며 울고 웃으려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별한 뒤 몇 걸음 걷는 길, 동행했던 법보신문 이학종 사장이 나직히 말했다. “부처님이 환생하신다고 해도, 스님이 걷는 길과 견해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말을 들으며 뒤돌아보니 스님은 기자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두손으로 염주만 한없이 만지작거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