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승가대학 초창기 모습. 승가대 발전 기금 전시회.
1979년 정월 초 두 스님은 강원을 만들겠다는 일념을 안고 마곡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성문스님 말 대로 “돈 한 푼 없어 내려갈 차비도 없는” 백지 상태였다.

두 스님은 우선 안면이 있던 두 스님을 만났다. 한 스님은 월주스님 상좌로 개운사에 있던 평상스님(후일 금산사 주지 역임)이고 다른 한 스님은 의정부 쌍용사에 의탁하고 있던 현담스님(시인, 후일 불교신문 주간 역임)이었다. 두 젊은 도반 역시 승가대학 설립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며 돕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돈이었다. 마침 현담스님이 있던 의정부 쌍용사 주지 도윤스님이 종로 비원 앞에서 동부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현담스님으로부터 정보(?)를 들은 성문 화정 두 스님은 도윤스님을 만나보기로 했다.

석주 성우 도윤스님 등 원로 중진스님들 후원과 격려

범산 평상 현담 스님 등 도반들 학교 운영 맡아 지원

당시 쉰을 바라보던 나이의 도윤스님은 대강백 관응스님 상좌로 뛰어난 불교학자인 김동화 박사와는 종숙질(從叔姪)관계였다. 의정부 쌍용사와 도윤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성문 화정스님에다 현담스님, 평상스님 그리고 범어사 강원에서부터 인연이 있던 범산스님까지 가세했다.

그리고 또 한명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합세했다. 현재 불교텔레비전 회장을 맡고 있는 성우스님이다. 성우스님은 성문스님이 대장부의 길을 걷도록 인도한 분으로 두 사람은 고송스님을 같은 은사로 둔 사형사제 간이다.

성우스님은 학교 설립 기금 900만원을 쾌척해 학교가 출발하도록 도왔으며, 중앙승가학원 첫 원장을 역임한 최대 조력자였다. 중앙승가대학 역사 첫 페이지에 나오는 쌍용사 발기인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승가대학 교수진과 영화사 기숙사에서 좌담회.
승가대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승가대학교의 역사는 1979년 2월24일 의정부 소재 쌍룡사에서의 중앙불교승가학원 설립 발기 모임을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범산.성문.화정.성우.평상.도윤 스님 등이 발기인으로 참석한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한국승가 전통교육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발원을 하였다.” 6명의 스님은 이렇게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실무는 여전히 성문 화정 두 사람이 맡아 뛰었다. 서울에 사무실을 내어 재가 교수를 강사로 모시고 공부를 하기로 했다. 우선 강사를 모시기 위해 나섰다. 가장 먼저 운학스님을 찾아갔다. 운학스님은 동작동 국립묘지 안의 화장사(華藏寺)에 주석하던 지관스님을 소개했다. 도윤스님의 은사스님으로 성문 화정스님 등이 배움을 청했었던 관응스님도 초창기 강사로 참여했다.

이어 월운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은 당신이 가끔 법문을 가던 서울 동소문동 보문사 요사채를 학교로 쓸 수 있을지 모른다며 소개했다. 성문스님의 기억이다. “당시는 절에서도 민가처럼 불사를 하면서 책력(冊曆)을 참고했다. 월운스님이 ‘보문사 요사채에 구량신이 들어 불사를 하지 않는다’며 잘하면 강의실로 빌려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보문사로 갔다”

스님들은 우선 사무실을 빌려서 강의를 시작하자는 마음에 30평 가량 사무실을 조계사에서 멀지 않은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찾고 있었다. 마땅한 사무실은 발견했지만 임대보증금 300만원이 없어 발만 구르던 참이었다. 월운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당장 보문사로 갔다. 장소도 혜화동 부근이었으니 이 보다 적합한 곳이 없었다.

불교신문 3월18일자 학인 모집 광고는 이렇게 해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땅한 연락처도, 원서를 받을 사무실도 없어서 원서 배부처 접수처가 제 각각이었다. 조계사 맞은 편에서 출판사와 서점을 겸했던 불서보급사에 원서를 갖다 두었다. 정동의 MBC 방송국 옆 불교중앙문화원을 접수처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신문 강찬신 주간 덕분이었다. 그리고 도윤스님이 운영하던 비원 앞 동보한의원을 문의처로 삼았다.

   
회암사에서 야유회 모습.
학교는 개원을 주도한 스님들이 보직을 맡아 운영했다. 성문스님은 총무, 평산스님은 교무, 범산스님은 재무를 맡았다. 스님들은 강의를 듣는 학생이며 강의를 하는 강사며 학교를 운영하는 보직자 3역(役)을 맡았다. 30평 가량 되는 보현사 요사채는 두 곳으로 나눠 강의실과 교무실로 이용했다. 기거할 곳이 없어 스님들은 서울 시내 사찰에 흩어져 지냈다.

학인을 모집하고 4월14일 개원했다. 초대 학장은 성우스님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강료를 받기는 했지만 운영비가 많이 부족했다. 모두 화주를 통해 조달해야 했다. 하지만 이름도 알지 못하는 젊은 학인들을 보고 선뜻 돈을 줄 스님이나 불자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분이 석주스님이었다. 성문스님은 “몇 몇 스님을 생각하다 석주스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그 분이 1979년에 이미 71세에 이른 노장스님이었다. 큰 스님은 일찍이 포교 역경에 앞장서고 서울에서 어린이 법회를 운영할 정도로 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칠보사로 찾아가 취지를 말씀드리자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큰 스님께서는 파란색이든 흰색이든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이 뭔가 변화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하셨다. 우리 일에 모임이 있으면 꼭 참석하실 정도로 열정적이며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학교 개원 후에도 운영비 없어 전국 사찰 다니며 화주

보현사서 출발… 분산된 강의실 기숙사 개운사로 합쳐

석주스님은 개원법회에 참석해 젊은 학인들을 격려했다. 총무원장을 지낸 혜정스님도 많은 관심을 표했는데 학교가 아닌 학원 명칭이 혜정스님의 생각이었다. 이외 중앙종회의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통도사 벽안스님, 감찰부장을 역임한 석옹스님, 마곡사 주지를 지낸 진철스님 등이 힘을 보탰다.

운영비 마련을 위해 스님들은 가을에 전시회를 연다. 그동안 화주를 하며 받은 스님들의 글과 그림을 전시해 운영비를 마련했다. 전시회가 끝난 다음날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다. 종단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정국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혼돈기 였지만 배움에 목마른 스님들의 학구열은 식지 않았다.

이듬해 3월 신입생 모집에 들어간다. 동시에 교실 문제가 발생했다. 30평 가량 되는 보현사 요사채를 빌어 겨우 학사와 교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한 학년이 더 늘어나 강의실이 추가로 필요해졌다. 마침 보문사 밑 작은 건물 하나가 비어있어 수리하면 강의실로 사용할 수 있었다.

수리 비용이 문제였다. 석주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성문스님은 “상도동 백운암에 서옹 종정스님을 모시던 보살이 있었는데 석주스님과 나이가 비슷했다. 석주스님이 그 보살에게 돈 좀 내라고 해서 150만원을 받아와 수리를 해 칸을 막고 강의실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성문 화정 스님을 비롯한 보직을 맡은 스님들이 화주를 해 어렵게 학교를 운영해가던 중 10.27 법난이 발생했다. 젊은 스님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법난을 자행한 신군부에 대한 분노보다 젊은 스님들이 교육하고 각성해야한다는 내부 자성 움직임이 더 강했다.

성문스님은 “당시는 10.27 법난이 일어난 우리 내부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승가교육을 강화해 한국불교가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문제인식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중앙승가학원을 종단의 공식 승가교육기관으로 정해 재정적 안정과 종단의 교육체계를 혁신해야 한다는 승가대학의 종단화 움직임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학인들의 연합체 구성이었다.

   
제1기 졸업식 모습.
후자는 주로 성문스님이 주도했다. 스님은 학원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강원을 돌며 화주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젊은 스님들 사이에 구심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1980년 말 강원이 중심이 된 교림회(敎林會)를 결성한다. 그리고 1981년에는 중앙승가대학에 출재가가 모여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스님들은 3박4일간 합숙하며 한국불교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이를 통해 성문스님은 1980년대 초 중반 종단에서 청년 승가의 대표자로 떠오른다.

승가대학의 종단 공식교육기관화는 1980년부터 본격화됐다. 먼저 1980년 1월 학교 명칭을 중앙승가학원에서 중앙승가대학으로 개편하고 초대 학장에 석주스님을 모셨다. 중앙승가대학의 종단 대학화는 1980년 12월 10.27법난 후 출범한 임시 집행부인 정화중흥회의의 주요 과제로 상정됐다.

개혁회의는 보현사 승가학원을 종단 공식 승가대학으로 삼기로 하고 학사를 개운사의 3층 건물 350평을 사용하기로 했다. 기숙사는 구의동 영화사로 정했다. 모집 인원은 한 학년 40명으로 정했다. 정화중흥회의의 결의를 이어 1981년 3월 총무원은 중앙승가대학 설치령을 공포했다.

하지만 중앙승가대학은 한동안 학교는 개운사, 기숙사는 구의동 영화사로 분리돼 불편이 컸다. 학생들은 개운사를 중앙승가대학 운영 사찰로 삼아줄 것을 종단에 요구해 개운사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총무원은 한때 중앙승가대학을 불국사로 이전하기로 종무회의에서 결의하는 등 학교 운영을 어려워 했다.

이런 가운데 1981년 3월21일 비구니 스님들이 비구니 전용 현대식 대학인 한국비구니 대학을 개원한다. 이 과정에서 비구니 중진스님들이 석주스님에게 중앙승가대학에 재학 중인 비구니스님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해 성문스님이 단독으로 만나 설득시킨다.

한국비구니 대학은 1982년 2월21일 중앙승가대학과 합병을 결의해 오늘에 이른다. 승가대학은 이후 4년제로 개편하고 불교사회복지학과를 개설하는 등 정규대학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성문스님은 이후 청년 승가의 구심점이 되어 중앙승가대학 발전과 함께 종단 발전을 위해 나선다. 화정스님은 1983년 건강악화로 인해 환속, 한때 한약방을 운영했으며 최근까지 선(禪)관련 서적을 펴내고 있다.

[불교신문 2736호/ 7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