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엄 스님 발자취 담은 첫 평전
3년간 자료‧증언 바탕으로 집필
수행자 귀착점 ‘마음수행’ 강조
“부처님 뵙고 나 자신 찾으라”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이자 근현대 비구니 승가 위상을 재정립한 세주당 묘엄 스님(1932~2011)의 삶과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 출간됐다. <묘엄 평전>은 스님의 출가에서 열반까지, 치열했던 구도 여정과 근현대 비구니 승가를 일궈낸 원력을 600여 쪽의 방대한 기록으로 담아냈다.
묘엄 스님의 삶은 그 시작부터 한국불교의 거목들과 맞닿아 있다. 청담 스님의 딸이자 성철 스님의 첫 비구니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고, 운허 스님에게 경전을 배웠으며 자운 스님에게 전계를 받아 최초의 비구니 율사가 됐다. 또 청담‧성철 스님이 이끈 봉암사 결사에도 비구니 중 가장 처음으로 동참했다.
이러한 불연(佛緣)은 엄혹한 시대에서 잉태됐다. 묘엄 스님은 집안의 대(代)를 잇기 위해 눈물로 애걸하는 어머니의 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한 청담 스님의 ‘하룻밤 인연’으로 태어났다. 어린 인순은 부모의 이혼으로 호적상 ‘사생아’로 기록됐고, 호적이 없는 여자아이는 위안부로 끌려간다는 소문에 청담 스님이 머물던 대승사로 보내졌다.
성철 스님은 ‘비천해 보이는 여자 중은 안 될 것’이라고 당차게 말하는 인순에게 ‘승중(당시 스님을 부르던 말)계의 혁명을 일으키는 큰 중이 되라’고 권하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1945년 음력 5월 5일, 열네 살 인순은 그렇게 묘엄 스님이 됐다.

이후 묘엄 스님은 열네 살에 시작한 화두 참구를 평생 이어갔고, 운허 스님에게 교학을 배워 당대 최고의 비구니 강백으로 거듭났으며, 지천명의 나이에 자운 스님으로 전계를 받아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가 됐다. 또 동학사와 운문사 강원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봉녕사 강원‧봉녕선원‧금강율원을 설립해 비구니 승가의 선‧교‧율맥을 반석 위에 세웠다.
박원자 작가는 3년에 걸친 집필 과정에서 수많은 자료와 증언을 모아 묘엄 스님의 삶을 복원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면서도 그 중심에 놓인 선·교·율이라는 수행의 축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 묘엄 스님을 비롯한 40여 대중은 1952년 봉암사 결사 정신을 이은 창원 성주사 결사에 참여했다. 박원자 작가는 “한국전쟁 중에도 성주사는 봉암사 결사 방식 그대로 정진했고, 묘엄 스님은 온 마음을 다해 ‘이뭣고’ 화두에 정진했다”고 밝혔다. 본각 스님(전 중앙승가대 교수)은 “성주사 결사는 출가 정신을 확고히 하고 수행 전통을 세우려 애쓴 선각자적 모습을 보여 준다”며 “비구니 승단이 출가 승단의 한 축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 결사”라고 평가했다.

아버지 청담 스님과 ‘출가자’로서의 만남도 기록했다. ‘출가’를 아버지에게서 받은 최고‧최대의 정신적 유산이라 여긴 묘엄 스님이지만, 아버지의 변변찮은 공양에 콧등이 시큰해지고 구겨진 광목 장삼에 눈물을 흘린 딸이기도 했다. 비구니계의 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청담 스님. 묘엄 스님은 훗날 청담 스님과의 영원한 작별을 회고하며 ‘너무 슬펐다’고 말했다.
묘엄평전간행위원장 진상 스님(봉녕사 주지)은 12월 18일 열린 출판간담회에서 “스님께서는 수행자의 귀착점이 ‘마음공부’이고, 선교율이 이를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평생 강조하셨다”며 “스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다룬 이번 평전이 후학들의 수행과 교육에 지침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봉녕사승가대학 학감 도연스님은 "(비구니스님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갖추려고 노력하셨고 저희 봉녕사승가대학이 그렇게 설립됐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라고 전했다.
“마음공부는 상대적인 부처님을 뵙고 절대적인 나 자신을 찾는 것이다. 자기를 단속하여 인천의 사표가 되고 생사에 자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
묘엄 스님이 임종 때 남긴 이 유훈은 누구나 부처의 성품이 갖추어져 있음을 철저히 믿고 생사발심해서 수행하라는 당부이자, 스님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