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와 불광불사 짓겠다” 다짐 생생
보리도 이루기 위해 환생했을 것 확신
스님께서는 입적 당일에 떨어져 살고 있던 나에게 당신의 길 떠날 소식을 전하셨다.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자 두 줄기 긴 눈물을 남기시고 먼 길을 떠나셨다. 난 스님께서 마지막에 보이신 두 줄기 눈물의 유촉을 알고 있기에 그동안 다시 만날 스님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지금까지 학수고대로 기다리며 사는 나의 삶이다.
그런 스님은 말년에 거의 누워서 지내셨다. 누워 있는 것조차 힘들거나 육신이 고통스러울 때는 더 큰 힘을 내어서 “난 다시 와서 불광 불사를 지을 거야!”라고 다짐을 두시곤 했다. 당시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들은 말이고 자주 듣던 말이기도 하다. 생전의 스님께서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불광의 전법불사를 당신의 처음 계획대로 짓는 일이다. 그런데도 건강이 따라주지 않았고, 그래서 늘 안타까운 심정을 지니고 거의 평생을 사셨다. 마음 깊은 곳에 아쉬움을 지니고 살던 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훤하다.
그때 곁에서 환생에 대한 다짐을 들을 때는 스님의 심정이 그저 그르려니 하고 짐작하거나 이해하고 지나쳤다. 그러나 막상 스님께서 입적하시고 나자 다른 말씀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그 말씀만 귓전에 맴돌았다. ‘그렇지, 스님께서 분명히 오신다고 다짐 두셨으니 기왕 오실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오시도록 환생기도를 올리러 떠나자’라는 생각이 문득 일었다. 나는 바로 행동에 옮겼다. 1999년 6월 6일 안성 도피안사 스님 입적 백일추모재 때 『광덕스님시봉일기1』권을 상재하고, 나는 보따리를 챙겨 티베트 수미산〔카일라스〕으로 스님의 속환사바 재명대사(速還裟婆再明大事)의 환생기도를 위해 떠났다.
그 길은 경험없고 준비마저 소홀했던 초행길이어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겨우 수미산까지 이르렀다. 이를 악물고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환생기도를 했고, 스님의 인도와 수미산의 자비로 기도의 감응(感應)을 전해 받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받은 감응은 스님 환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로부터 시봉일기가 이어져 나왔고, 두어 차례 더 환생기도를 갔었다. 우연인진 몰라도 내가 올렸던 광덕스님 환생기도로 수미산길이 열려 그 다음해부터 우리 한국불자들의 수미산 순례가 본격 시작되기도 했다.
아무튼 스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윤회전생을 믿게 되었으며 스님의 환생소식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환생이나 윤회가 불교의 기본적인 신앙임에도 현재처럼 굳건하게 믿은 적이 없었다. 선지식들이 윤회를 그렇게 강조하고 윤회를 믿지 않으면 불자(佛子)가 아니라고 나무랐어도 그저 그르려니 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스님께서 기회 닿을 때마다 환생을 다짐 두셨어도 나는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만약 그 사실을 스님 생전에 조금이라도 깊이 받아들이고 알았다면 좀더 자세하게 환생에 대한 스님의 뜻을 여쭈었을 것이다.
어디로 태어나실 것이며, 언제쯤 다시 오실 것인지, 또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거나 찾을지를 세세하게 묻고 들어서, 거기에 따르는 준비를 했을 것이다. 이제 돌아보면 못내 아쉬움이 많다. 모두 내가 어리석고 부족하고 미처 믿음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게라도 이렇게 윤회를 믿고 환생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스승이신 스님의 자비하신 은혜덕분이고, 나아가 불자의 한 사람으로서 윤회전생을 확신하는 것에 대해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아 자부심을 갖게 된다.
지난 2008년 11월, 꼬박 10년에 걸친 시봉일기 작업을 마친 뒤 나는 깊은 의문에 빠졌다. 스님 생전에도 더러 느끼긴 했지만 시봉일기 작업을 하면서 더 뼈저리게 느낀 점은 스님의 인격, 사람 됨됨이었다. 도대체 스님이라는 한 인물의 그 대단한 인격형성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 단초가 어디일까를 깊이 생각해 보고 궁구했었다. 나는 스님의 삶을 역추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면밀히 찾아봤다. 그런데 거기 꼭지점에 스님의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다. 김씨 동낭(金東娘)이셨다. 난 스님과 어머니의 관계를 더 자세하게 알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생존해 있던 사촌 손위 누이를 일산으로 찾아가 만났다. 비로소 나의 모든 의문은 풀렸다. 아니, 숙제를 해 마쳤다.
어머니와의 인연, 그 깊은 교류를 통해서 스님의 인격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세세히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스님께서 환생하시면 다시 그 어머니를 찾아서 의지할 것이라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일었다. 도저히 두 분의 인연이 지난 한 생의 인연으로서만 끝날 것 같지가 않았고, 삼생의 인연으로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번쩍 들었다. 어느 곳 어느 때에 태어나더라도 서로의 생을 돕고 보살행을 함께 받들어 보리도를 닦아나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난 두 분의 모자관계가 삼생의 인연이라고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 숫자가 아닌 ‘과거 현재 미래’로 잇고 이어지는 삼생 말이다.
난 지난 2005년 7월에 다시 수미산으로 환생기도를 떠났었다. 말하자면 스님의 속환사바를 재촉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그 때 나는 천신만고 끝에 수미산 가슴에까지 다가가 거기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까닭을 알 수 없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마구 쏟아졌다. 가슴에 쌓이고 쌓인 수많은 말도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꽉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열리는 환희에 온 몸을 떨며 목 놓아 울면서 기도를 올렸다. 모든 서러움이 녹아내리고 한없는 그리움이 녹아내리고 숱한 고뇌가 다 녹아내린 내생명의 청정과 신성을 온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결코 남들이 와보지 못하는 곳에 내가 올라갔다는 감흥 때문이 아니었다. 수미산 순례를 떠나는 날부터 나의 환생기도는 시작되었기에 그 기도에 대한 응답, 스님의 감응으로 그동안 가슴에 막혔던 것이 뻥― 뚫렸던 것이다. 나는 엉엉 소리쳐 울면서도 스스로 장부의 비장한 눈물이라는 것을 느꼈고, 애써 감추지도 않았다.
스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원에 의해 환생하셨다. 그때의 나의 기도로 살펴보면 어딘가에 다시 오신 스님께서는 이제 한국나이로 아마 네 살쯤 되었을 것이다. 스님께서는 생전의 불법원력이 있었고 불광불사의 미진을 늘 아쉬워 하셨고 다시 보리도를 원만하겠다는 수행의 뜻이 깊으셨기에 그 모든 일을 원만하기 위해 스님은 이제 다시 환생하셨다고 본다. 수미산 가슴에서 나의 환생기도에 감응하셨듯이 분명 다시 나투신 그 모습을 내가 먼저 뵙고 모시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오늘도 두 손 모아 그날을 기다리며 이렇게 산다.
어언 스님께서 입적(양력 2월 27일, 음력 1월 12일)하신지도 11주년이 됐다. 해마다 불광사에서는 음력으로 기일을 모시고 이곳 도피안사에서는 양력으로 기일을 모신다. 스님께서 이곳 청량도솔산에 절을 짓도록 허락하셨고 절이름마저 지으셨기에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스님 입적후 개산조(開山祖)로 모셨다. 그래서 기일이나 개산일에는 소홀함 없이 모신다. 아, 스님의 환생…….
비록 내가 부족하드라도 환생하신 스님께서는 분명 이곳으로 통지하실 것을 믿고 시골절을 지키며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산다.
1038호 [2010년 03월 03일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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